사회 소식

반기문

慈馨 아찌 2006. 10. 15. 08:22

반기문(潘基文)

 

1844년 6월13일 충북 음성 출생. 현 외교통상부 장관 (제7대).

충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1970), 하버드대학교 행정학 석사(1985). 제3회 외무고시 합격(1970), 외무부 입부(1970),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1976), 외무부 국제연합과 과장(1980),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1985), 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1987). 외무부 미주국장(1990), 외무부 장관특별보좌관(1992), 외무부 외교정책실 실장(1995), 대통령비서실 의전 수석비서관(1996.2),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1196,11),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1998), 외교통상부 차관(2000), 제56차 유엔총회 의장비서실 실장(2001), 외교부 본부대사(2002),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2003),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

수상내역: 녹조근정훈장(1975), 홍조근정훈장(1986), 오스트리아 대훈장(2001), 브라질 리오 블랑코 대십자 훈장(2002),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2004), 페루 태양 대십자 훈장(2006).

 

유엔사무총장 사실상 내정 반기문은 누구

 

천지가 개벽한 '개천절'날 유엔 사무총장직에 사실상 내정된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은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겸비한 인물로 통한다.

`부드럽지만 안으로는 독하고 독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외유내강에 강이 하나 더 붙은 `외유내강강(外柔內剛剛)'형으로 불린다.

미소를 머금은 따뜻한 표정과 매너처럼 반 장관은 일로 충돌해도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게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반 장관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다. `일'에만 몰두하지 그 밖의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워커홀릭(workaholic)이다. 특별히 휴가를 가지도 않는다.

반 장관 스스로도 "대학 때 바둑 등의 취미를 가져보려고 했지만 그 보다는 학습에 시간을 더 집중하고 싶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거나 "외교관이 되고나서는 일하는게 너무 좋아서.."라고 털어놨다.

대학 때는 전공 이외에 영어와 프랑스어 등의 공부에 집중했던, 요즘 말로 `범생'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외교관을 꿈꿔왔다고 한다. 충주고 재학 시절, 갈고 닦은 영어실력으로 미 정부가 주최하는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 입상, 부상으로 그 시절 미국을 구경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때가 1962년이었다. 반 장관은 대회를 주최한 미국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을 접견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장래 희망이 외교관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을 때 외교관이라는 꿈을 다졌다"고 말한다.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 1970년 5월 외무부에 들어와 40년 가까이 외교관의 길을 걷고 있다.

외교부내에서 그는 '특별히 기수가 없다'고 해서 '특기'로 통한다. 상하좌우의 모든 인사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그는 `성실함'으로 유명하다.

선배들이 장관직에 오르면 대부분 그를 가까이 두려했다. 한 전직장관은 "반기문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관운이 좋았다.

외교부에서 차관보, 차관 등의 요직과 청와대의 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외교보좌관을 거쳤으며 마침내 참여정부의 두 번째 외교통상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주니어 외교관 시절부터 유엔 관련 업무를 많이 맡았던 것도 눈에 띈다. 국제연합과 차석, 주국제연합 1등 서기관, 국제연합 과장 등을 역임했고 북미국장, 주미 공사, 외교정책실장 등을 거쳤다.

이런 경력으로 그는 2001년 9월 당시 한승수(韓昇洙) 외교부장관이 겸임했던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발탁될 즈음 9.11사건이 발생해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그리고 이견 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

반 장관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새옹지마'라는 말을 많이 한다. 관직생활을 마감하는게 아니냐고 고심하던 그에게 한승수 장관이 그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그 즈음 그는 유엔 사람들과 정말 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됐다. 오늘날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할 수 있는 자양분을 미리 키웠던 것이다.

또 이라크에서 2004년 6월 '김선일 피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민들의 질타가 쏟아져 한때 입지가 흔들렸으나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올 2월 유엔 사무총장 출마를 선언하게 됐다.

반 장관은 한 때 `주사'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고위직이면서도 그 직급에 관계없이 자질구레한 일도 손수 챙겼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배려가 몸에 밴 탓인 지 지금도 부하 직원에게 출입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풀어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업무와 관련해서는 철두철미하고 솔선수범형으로 통한다.

미흡한 점과 잘못은 분명히 지적하고 대안(代案)을 요구해 어지간한 준비없이 보고했다가는 당황하기 일쑤라는 것. 그러나 부드러운 어법을 사용하고 질책하는 일은 거의 없어 부하직원들이 보고를 꺼리는 일은 없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그의 독특한 어법은 유명하다. 장관실 문을 걸어잠그고 그와 30분만 독대를 하면 금세 `반기문 팬'이 돼버리고 만다.

그의 부지런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일요일 출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게 몸에 배어있다. 미국과 유럽, 중동, 아프리카 출장의 경우 시차를 감안해 이동하는 시간에 비행기에서 숙박하는 일정을 잡는 게 다반사다.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반드시 회신을 해주며 수많은 연하장을 보낼 때도 자신의 이름은 직접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자신이 모셨던 노신영(盧信永) 전 총리에게서 '사람관리'의 비법을 배웠다한다.

그는 별도의 체력관리를 하지 않는다. "일하는 것 자체가 체력관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흐르는 물처럼 행동하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지치지 않는 비결이라고 자랑한다.

그는 특히 `낮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탓에 반 장관이 취임한 이후 주요 간부들이 점심식사후 10∼20분의 토막잠을 멀리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고 한다. 부득이 토막잠이 필요하다면 간부들은 부하 직원에게 `세면장에 갔다'는 본의 아닌 거짓말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

보수적인 성향은 잘 알려져 있다.

외교라는 영역 자체가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의 보수적 성향은 외교관 생활 속에서 배양된 것이라는 게 주변의 지적이다. 장관 취임후 그가 직전의 윤영관(尹永寬) 장관이 보여줬던 `발탁' 인사스타일과는 달리 가능하면 연공 중심으로 인사를 한데서도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반 장관은 작년 10월 정부가 내부 논의절차를 거쳐 유엔사무총장 후보로 확정한 뒤 조용하면서도 철저하게 전 세계의 마음을 사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그런 그에게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면접'을 한 뒤 흡족해했다고 한다.

반 장관은 충주고와 충주여고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난 유순택(柳淳澤) 여사와의 사이에 선용과 현희, 우현씨 등 2녀1남을 두고 있다. 둘째 딸 현희씨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으로 아프리카 케냐에서 일하고 있다.                                                                -  연합뉴스.06.10/3 -

37년 외교관 외길 ‘지독한 일벌레’

 

외국서 새벽 귀국뒤 출근할 정도 ‘성실맨’  /  “색깔 없다” 시선…유엔개혁 이끌지 주목

» ① 충주 교현초등학교 시절 동생들과 함께 과수원에서. 뒷줄 가운데가 반 장관. ② 충주중 16회 졸업앨범 속의 반 장관. ③ 충주고 3학년 때 ‘청소년적십자 국제견학 계획 및 연구대회 프로그램’에 선발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외국에 나갔다 올 때는 어김없이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곤 외교부 청사로 직행해 바로 회의를 소집하는 등 일을 본다. 외교부 직원들은 이런 반 장관을 두고 “지독한 일벌레에 타고난 강골”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 출마 뒤 프랑스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지난 7월24일 안보리의 1차 예비투표 결과를 통보해 온 당시 안보리 의장인 사브리에르 유엔주재 프랑스 대사와 프랑스어로 대화한 것은, 뜻한 바를 성취하는 그의 성실함과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다. 그는 요즘말로 ‘타고난 범생’이지만, 야사에 가까운 외교 뒷얘기 등 재미있는 화제로 상대방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묘한 능력이 있다.

반 장관의 이런 외유내강형 성실함은 그가 2001년 외교부 차관에서 다음 보직 없이 낙마했다가 곧바로 유엔 대사와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으로 부활한 것이라든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보좌관을 거쳐 장관에 취임한 다섯달 뒤인 2004년 6월 김선일 사건이라는 악재 위기에서 살아남는 데 힘이 됐다는 게 중평이다.

반 장관은 사석에서 “아마도 내가 대한민국에서 차관급 직책을 가장 오래 수행한 공무원일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 그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96년), 외교부 차관(2000년), 청와대 외교보좌관(2003년) 등 차관급 직무를 오랜 세월 맡았다. 나서지 않고 실무를 꼼꼼하게 챙기는 ‘2인자적 기질’을 느낄 수 있는 경력이다.

이런 탓에 반 장관한텐 ‘색깔이 없다’거나 ‘보수적’이라는 비판적 시선이 늘 따라다닌다. 미국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국제 평화를 관리하고 분쟁을 중재하며 유엔 개혁의 과제를 힘있게 풀어가야 할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으로선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다.

반 장관은 1944년 충북 음성 출신으로 70년 외무고시(3회)에 합격해 37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온 한국의 대표적 직업 외교관이다.

 

반기문은 누구인가

 

» ④ 당시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했다. ⑤ 1965~66년 육군 사병 근무시절. ⑥ 1970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식 때 가족들과 함께. 가운데가 반 장관, 왼쪽으로 아버지 반명환씨(91년 작고), 오른쪽은 어머니 신현순옹(81).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외국에 나갔다 올 때는 어김없이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곤 외교부 청사로 직행해 바로 회의를 소집하는 등 일을 본다. 외교부 직원들은 이런 반 장관을 두고 “지독한 일벌레에 타고난 강골”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 출마 뒤 프랑스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지난 7월24일 안보리의 1차 예비투표 결과를 통보해 온 당시 안보리 의장인 사브리에르 유엔주재 프랑스 대사와 프랑스어로 대화한 것은, 뜻한 바를 성취하는 그의 성실함과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다. 그는 요즘말로 ‘타고난 범생’이지만, 야사에 가까운 외교 뒷얘기 등 재미있는 화제로 상대방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묘한 능력이 있다.

반 장관의 이런 외유내강형 성실함은 그가 2001년 외교부 차관에서 다음 보직 없이 낙마했다가 곧바로 유엔 대사와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으로 부활한 것이라든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보좌관을 거쳐 장관에 취임한 다섯달 뒤인 2004년 6월 김선일 사건이라는 악재 위기에서 살아남는 데 힘이 됐다는 게 중평이다.

반 장관은 사석에서 “아마도 내가 대한민국에서 차관급 직책을 가장 오래 수행한 공무원일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 그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96년), 외교부 차관(2000년), 청와대 외교보좌관(2003년) 등 차관급 직무를 오랜 세월 맡았다. 나서지 않고 실무를 꼼꼼하게 챙기는 ‘2인자적 기질’을 느낄 수 있는 경력이다.

이런 탓에 반 장관한텐 ‘색깔이 없다’거나 ‘보수적’이라는 비판적 시선이 늘 따라다닌다. 미국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국제 평화를 관리하고 분쟁을 중재하며 유엔 개혁의 과제를 힘있게 풀어가야 할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으로선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다.

반 장관은 1944년 충북 음성 출신으로 70년 외무고시(3회)에 합격해 37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온 한국의 대표적 직업 외교관이다.                                                       - 한계레.06.10/4 -

 

반기문 누구인가


충주 영어신동이 ‘세계 평화의 대변인’으로

 

반기문(潘基文) 외교부장관의 어릴 적 주특기는 공부였다. 1944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충주로 옮겨간 반 장관은 학창 시절 내내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창고업을 하던 아버지(반명환·潘明煥)가 50년대 말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4남2녀 중 장남인 오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로 이름을 날렸다. 동생들에게는 학창 시절 내내 ‘반기문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막내 동생 반경희씨·약사)

◆충주의 영어 신동

그중에서도 반 장관의 ‘오늘’을 열어준 것은 영어실력이다. 충주중 시절, 영어교사가 무조건 하루에 배운 것을 10번씩 써 오라고 했다. 반 장관은 매일 같이 그 숙제를 다 하면서 문장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고 1 때는 같은 반 학생을 위한 영어 교재를 만들었다. 반 장관이 상당한 수준의 영어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충주비료 공장 때문이었다. 그 공장엔 미국인 엔지니어와 가족 2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미국인 엔지니어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회화를 가르쳤는데, 충주고의 반기문 학생이 제일 뛰어났다. 그 사람은 영어로 된 것이면 뭐든지 달달달 외우고 다녔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고향선배 안영수 경희대 교수·여)

충주에서 소문난 영어실력으로 고 2 때 적십자사에서 주관한 ‘외국학생의 미국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됐다. 한국에선 4명을 뽑았는데, 소도시인 충주 출신으로 반 장관이 뽑히자, “충주시가 난리가 났다”(남동생 반기상씨·사업)고 한다. 반 장관이 이듬해 고 3 여름에 한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할 때, 충주여고 학생들이 가사 시간에 미국인들에게 선물할 복주머니들을 만들어 전달했다. 이를 대표로 전달한 여학생이 충주여고 류순택(柳淳澤) 학생회장. 류씨는 반 장관이 외무고시에 합격한 다음해인 71년 서울 흑석동의 1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반 장관과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반 장관은 미국방문 당시 워싱턴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외국 학생들과 만났다. 틈틈이 꺼내본 케네디 사진은 반 장관을 외교관, 장관, 유엔 사무총장으로 이끌었다.

◆미국 아닌 인도 총영사관 자원

가세(家勢)가 기울어 고학을 하면서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반 장관은 70년 외무고시 3회 합격으로 외교관이 됐다. 최성홍 전 외교부장관에 이어 2등이었다. 반 장관은 가족들에게 “평생 1등만 해 오다가 2등을 처음 해봤다”고 말했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는 다시 1등을 해, 주미대사관에 발령받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반 사무관은 후진국인 인도(뉴델리)총영사관 근무를 희망했다. 반 장관의 동생 기상씨는 “미국에 가면 저축하기 힘든데 후진국에 가서 돈을 아끼면 집안에 보탤 수 있을 것 같아 형님이 인도를 자원했다”고 말했다.

그의 인도총영사관 근무 자원은 반 장관의 외교관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노신영 주뉴델리총영사(전 국무총리)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인도와의 수교를 위해 파견된 노 총영사는 햇병아리 외교관의 영어실력, 민첩함, 판단력, 성실함에 주목했다. 73년 한·인도 국교 수립으로 주뉴델리총영사에서 주인도대사가 된 노 전 총리는 공관장 회의에서 반 사무관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인도 근무를 회상하며, “(앞으로) 나를 도와 많은 일을 하게 된 초면의 반기문 사무관은 신혼 초였다”고 썼다.

노 전 총리는 안기부장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자 1급이 맡던 의전비서관에 3급인 반 장관을 임명했다. 이어 87년 이사관(2급)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그러자 반 장관은 당시 자신의 동기, 선배, 후배 100여 명에게 1주일에 걸쳐서 일일이 편지를 썼다. “일찍 승진해서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ABM사건

반 장관은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보→청와대 의전수석→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관운이 좋지 못했다. 주오스트리아대사에서 2000년에야 차관이 됐다. 반 장관과 비슷한 시기에 장관에 임명된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당시 기자에게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이를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2001년 반 장관의 외교관 인생 31년 만에 고비가 왔다. 그해 2월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실무진의 실수로, 부시 행정부가 폐기를 주장하고 있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 조약의 ‘보존과 강화’를 골자로 하는 문장이 포함돼 버렸다.

한·미 간에 큰 파문이 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내가 이 문제로 미국측에 얼마나 많이 사과를 해야 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정빈 장관과 반 차관이 차례로 경질됐다. 문책인사였다. 불명예 퇴진한 반 차관은 “죽고 싶다. 내가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 라며 연락을 끊었다. 경희대 안영수 교수는 ‘실업자’ 반기문에게 이젠 “차를 운전해 줄 사람이 없으니 지하철 타고 다니라”며 정기권을 사줬다.

◆전화위복

이런 그를 4개월 만에 한승수 당시 외교부장관이 발탁했다. 한 장관은 자신이 유엔총회 의장이 되자, 그를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겸 주 유엔대표부대사로 뉴욕에 부임시켰다. 외교부 차관을 한 사람이 겨우 유엔에 가서 국장급이 할 일을 하느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이 자리는 결국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하원기자 (블로그)may2.chosun.com)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사실상 확정

 ‘반 총장’ 굳히기까지

 “북극과 남극 빼곤 모두 누벼”

 

반기문 외교부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 출마를 공식화한 것은 올 2월이었다. 그러나 반 장관이 유엔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반 장관은 당시 차관에서 물러났다가 외교부장관인 한승수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1년 동안 유엔에 상주했다. 반 장관은 당시 ‘구수한 친화력’으로 유엔 사무국의 고위 직원 및 유엔 주재 대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북극·남극 빼곤 다 누벼”

2004년부터 차기 유엔 총장은 지역 순환의 관행에 따라 아시아에서 선출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자연스럽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반 장관은 “분단국에서 어떻게 유엔 총장이 나오겠느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출마 의사를 밝혔다.

실제 반 장관은 이미 선거운동 구상을 끝냈다고 한다. 공식 출마를 하기 전인 올 1월 말부터 아프리카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인 가나와 콩고를 방문했다. 반 장관은 올해에만 총 8차례 아프리카를 찾았다. 반 장관이 말라리아 예방약인 ‘키니네’를 상시 복용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유럽과 남미 대륙도 수시로 찾았다. 하루에 두 나라를 뛴 적도 있다. 워낙 고된 일정이라 수행 외교관을 수시로 바꿔야 했다. 불어권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틈틈이 불어 회화 연습도 했다. 반 장관은 “출마 후 북극과 남극을 뺀 웬만한 나라들은 모두 가본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인권 문제 제기에 가장 곤혹

전 세계를 지역구로 한 선거운동 중 가장 큰 악재는 역시 북한 인권에 대한 한국의 침묵이었다. 상당수 국가에서 인권 문제에 소극적임을 지적했다. 반 장관은 “유엔 총장으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 돌파해 나갔다.

북한 핵과, 특히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터진 북한의 무더기 미사일 발사(7월 5일)는 악재였다. 당시 유엔 등 국제기구가 개입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니고 있는 관련 당사국인 한국이 어떻게 유엔 사무총장을 맡을 수 있느냐는 비판이 미국 등 여기저기서 나왔다.

이때마다 반 장관은 유엔헌장에 규정된 유엔 사무국 ‘수석행정관’ 역할을 충분히 할 것임을 강조했다. 정치적 이미지보다는 관리자와 조정자의 인상을 부각시켰다.

반 장관은 지난달 14일 2차 투표에서 14개 이사국의 지지를 받은 후, 한·미 정상회담 석상에서 부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우호적 평가를 받았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때 “대세가 결정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안용균기자 (블로그)agon.chosun.com)      -조선,06.10/4 -

 

유엔사무총장, 고난도 외교력 요구되는 외교사령탑

 

국가원수급 예우..국제분쟁 해결 고통 수반
연봉 2억원..유엔 총장관저 임대료 1년에 1달러
유엔 사무총장직은 ’외적 화려함과 내적 고통’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다.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받으며 지명도에선 미국 대통령에 버금가고, 도덕적 권위면에서 교황의 권위에 종종 비유되면서도 늘 ’치어 리더’ ’고해 신부’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사무총장의 영어 표현인 ’SG’(Secretary of General)가 왕왕 ’속죄양’(scapegoat)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전세계 192개 회원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공평무사하게 풀어내야 하는 고난도 외교력이 요구되는 유엔 외교의 사령탑이다.

이를테면 본인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각종 국제분쟁을 중재하는 ’심판’ 또는 ’중재자’ 역할을 맡는 자리인 셈이다.

특히 노르웨이 스웨덴 미얀마 오스트리아 이집트 가나 등 강대국과는 거리가 있는 역대 사무총장 배출국의 면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무총장은 강대국 간의 민감한 이해관계를 중립적 위치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평화유지활동, 군비축소활동, 국제협력 증진 등 사무총장의 역할은 유엔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구촌 재상(宰相)’으로 칭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엔 헌장은 사무총장 신분에 대해 유엔 사무국의 수석행정관으로서 사무국 직원 3000여명을 지휘하며 업무수행에 있어 어떤 정부나 기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국제공무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무총장은 유엔 총회를 비롯,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등 모든 회의에 사무국 수장 자격으로 참여하며 국제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역할에 있어 독자적 정치력을 사용할 수 있다.

또 1만여명의 유엔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과 막대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국제적으로는 국가원수나 총리급 예우를 받는다. 국제평화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안에 대해 안보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분쟁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연봉은 1997년 이래 22만 7253달러(약 2억원)로 책정돼 있다. 판공비, 관사, 경호 등도 제공받는다. 다만 뉴욕의 총장 관저를 1년에 1달러만 내고 사용하는 특권도 누린다. 이 관저는 미국 유엔협회가 지어 상징적인 임대료만 받고 사실상 무료로 살게 해주는 셈이다.

외교 관례상 세계 각국에서 받는 의전은 당사국 행정부 수반의 수준에 맞춰지고 있다.

그러나 사무총장은 힘의 논리를 앞세운 국제사회에서 역할이 크게 축소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역대 총장들이 본인이나 해당 국가의 로비의 결과물이었다기 보다는 특수한 정치상황 속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5개 상임이사국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가진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아 왔다.

까다로운 5개 상임이사국들의 입맛을 맞춰 가면서 약소국들의 사정도 두루 살펴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만큼 내적 고민과 고통이 수반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 워싱턴=연합뉴스. 06.10/4 -
유엔사무총장 어떻게 뽑나…
 
반 장관 당선시 8번째 총장

반기문(潘基文)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에 당선되면 8번째 총장이 된다. 임기는 5년, 연임에 제한이 없지만 1회 연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7명의 사무총장 중 6대 부르토스 갈리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2대 함마르셀드를 제외하면 모두 10년간 재임했다.

유엔사무총장은 유엔안보리의 권고로 총회가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안보리가 내부 토론을 거쳐서 후보를 추천하고 총회가 과반수 이상 투표할 경우 당선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안보리가 추천한 후보가 총회에 거부된사례는 없다.

 

안보리가 단수 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황 선출 투표인 ‘콘클라베’에 비유되기도 한다. 단수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안보리 15개 국가 가운데 9표 이상을 얻어야 하고, 상임이사국의 반대표가 있으면 안 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5개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 하기 위해 안보리에서 본투표를 할 때는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 투표 용지를 각각 다른 색깔로 만든다. 15표 중에서 14표를 얻더라도 상임이사국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투표는 무효가 된다.

역대 사무총장들은 1대 트리그베 할브단 리에(노르웨이, 1946~1953), 2대 다트 함마르셀드(스웨덴, 1953~1961), 3대 우탄트(미얀마, 1961~1971), 4대 쿠르트 발트하임(오스트리아, 1972~1981), 5대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페루, 1982~1991), 6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이집트, 1992~1996), 7대 코피 아난(가나, 1997~2006) 등이다. 

     안용균기자            - 조선.06.10/4 -
 
사진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1970년 서울대 졸업식에서 부인이 된 유순택 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아래는 1972년 첫딸 선용 씨를 안고 있는 반 장관.       - 국제.06.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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